보도 19대 총선 정당별 주거 정책 비교-주거권이 보이지 않는 주거공약들 -펌글
2012.04.05 15:40
19대 총선 정당별 주거 정책 비교
주거권이 보이지 않는 주거공약들①
미류 기사인쇄 -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
올해 총선이나 대선에서 어떤 주거정책공약이 나올지 사뭇 기대됐다. 전월세 대란이나 뉴타운 출구 전략 논의 등 주거와 관련된 문제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부각되기도 했거니와, 최근 몇 년 복지국가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주거’와 ‘복지’를 연결시키려는 움직임들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드러난 문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고질적으로 앓아온 것이고 정권은 언제나 ‘주택공급’을 되뇌며 문제를 더 크게 부풀려 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시장이 하락하면서 불안정해지는 지금은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주거복지 논의는 더욱 다양한 정책 제안들을 모색하며 풍부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선은 무언가 다르기를 기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그동안 권리로서 인식되기는커녕 ‘재산권’에 압도되어 사회정책으로조차 다루어지지 못했던 주거‘권’의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것을 바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주거권을 가치로 하는 틀은 마련되지 못했고 주거권을 둘러싼 정치도 잘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녹색당의 주거 관련 공약들을 주거권의 관점에서 비교 평가하며 현재 무엇이 부족한지를 짚고 과제를 밝혀보려고 한다.
그리 쟁점이 되지 못한 주거복지
대부분의 정당들이 주거 관련 정책을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적어도 부동산 중심의 접근을 벗어난 점은 분명하다. 주택공급이나 부동산세제를 중심으로 주거 문제가 다뤄져왔던 것보다 진일보했다. 그런데 의외로 ‘주거복지’는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 주거복지는 복지국가 논쟁의 과정에서 유행하게 된 말이다. 주거 문제를 시장에서 집을 구매하는 것으로만 풀기 어렵고 국가가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자리 잡은 말인데 여전히 그 개념이 모호하다. 대표적인 주거복지정책으로 언급되는 공공임대주택은 목표치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정당이나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주거복지정책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정책은 언제나 있었다. 영구임대주택이 대표적이다. 주거복지가 쟁점이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주거복지의 패러다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정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의 핵심에 놓여야 할 ‘주거권’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주거복지를 내걸고 있는 것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다. 새누리당은 끝내 ‘복지’라는 말을 회피하고 있으며, 진보신당은 보편복지의 확대와 별도로 주거 정책을 다루고 있다. 주거를 복지의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움직임임을 감안하면, ‘주거복지’라는 말의 사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도 주거복지 분야의 정책공약들이 대체로 비슷하다. 주거복지법 또는 주거기본법의 제정, 공공임대주택 확충, 저소득층 주거비 지원 등이다. 민주통합당은 이와 더불어 주거취약계층을 위해 고시원을 대체할 수 있는 공공원룸텔을 확대하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비주택 거주민들의 주거 현실을 고려할 때 실효성 있는 정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여전히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소형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잔여적 지원을 하겠다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통합진보당은 ‘국가가 집 걱정 책임진다!’는 구호를 통해 주거복지정책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민간임대시장에 대한 정책들을 주거복지 패러다임 안에 체계적으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더 나아간 점이 있다. 또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겠다거나 재개발사업에 세입자조합원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 등 특색 있는 공약들을 통해 주거복지와 더불어 부동산양극화나 주민참여 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책임을 보여주는 만큼 인권으로서의 주거권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차별성을 엿볼 수 있는 민간임대주택 관련 정책
정당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민간임대주택에 대한 정책들이다. 이것이 주요 쟁점이 된 배경은 앞서 말했다. 그러나 ‘전세대란’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전세대란’은 고가의 아파트 단지들이 주도했다. 이미 많은 저소득층은 월세 시장으로 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고 언제나 난중(亂中)이었다. 주거비 부담은 주거권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주거비가 다른 기본적 재화나 서비스를 획득하거나 충족하는 것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2010년도 주거실태조사는, 전국 가구의 34.3%가 ‘생필품을 줄일 정도로 어렵’거나 ‘못 낼 정도는 아니지만 부담’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거비 부담만을 떨어뜨려놓고, 또는 천차만별인 주택들을 전세나 월세라는 점에서 동일한 선상에 놓고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 주거 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된 집에서 주거비 부담이 큰 것과,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주택을 소유해서 주거비 부담이 거의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대체로 세입자들이 주택 소유주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한 주거환경에 있기 쉽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거비 부담이 생기는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주거비 부담의 문제만이 아니라 점유의 안정성(충분한 점유 기간 보장)이 취약함, 주거환경의 열악함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다. 또한 주거비 부담은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저해하는 요소로 다뤄지기도 하므로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설정되는지도 중요하다.
새누리당은 ‘줄어든다! 주거비’를 구호로 내걸었고 마지못해 전월세 상한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새누리당은 여기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다. 민주통합당은 복지 분야가 아닌 ‘경제민주화 실현과 민생안정’ 분야에서 전월세 상한제와 민간임대주택 등록제 도입을 다루고 있다. 민주통합당이 복지와 관련해 사회투자론을 표방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주거비 부담 경감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 차원에서 맥락화되기 쉽다. 또한 ‘보편적 복지’ 분야에서 주택바우처 제도 도입을 약속하고 있다. ‘수요자 중심의 시장 친화형 주거지원제도’라는 점을 중요시하며 저소득층 가구 중 일부에 월평균 11.5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돈은 결국 집주인에게 월세로 전달되는 것이다. 민간임대시장의 과도한 임대료를 공공이 지원하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정책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구성되는지가 중요하다.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이 민간임대시장과 관련해 내놓은 정책들을 대부분 내놓고 있다. 여기에다가 공정임대료 제도를 도입하고 저소득층의 월 임대료 부담이 소득 대비 25~30%가 되도록 임대료를 지원하겠다는 정책 등을 엮어서 주거복지정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차이다. 누구의 주거비 부담을 얼마나 줄일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시장 임대료에 대한 규제를 병행하는 것은 주거권의 관점에서 고민한 흔적이 더 묻어난다.
주택의 사회화, 선명하지만 아쉬운
한편, 민간임대주택과 관련해 진보신당의 접근은 선명하게 다르다. ‘주택보급률 100% 시대, 모든 국민에게 집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기존의 자가 소유 촉진 정책과 다르며, 주거권을 주택의 소유 문제로 귀속시키지 않으면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에서는 누가 열악한 주거환경과 높은 주거비 부담으로 고통 받고 있는가가 드러나지 않고, 국가가 더 많은 주택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다시 ‘소유’를 쟁점으로 만들고 있다. 진보신당은 자가 거주 목적 이외의 주택을 수용하고, 부채가 과도한 주택대출을 국가가 인수해 사회주택으로 확보하겠다는 공약을 냈다. 주택을 사회적 공공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성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공공임대주택의 확충 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신규공급 위주의 접근을 벗어나 기존 주택을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공공임대주택 확충 전략이 가지는 한계는 여전히 남는다.
공공임대주택의 확충은 이제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조차 공공임대비율 10~12%를 주거공약의 첫 번째로 내세웠다. 그러나 공공임대주택을 대규모로 신규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땅이 필요하고 이것은 개발의 문제와 구분해서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정당들도 신규 공급이 아닌 방식을 고려하며 그 중 진보신당이 제안하는 수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택 소유의 공공성만으로 주거의 공공성이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공공임대주택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적은 현실과, 민간임대시장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는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민간임대시장에서 주거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공임대주택의 대기자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별로 비교하더라도 공공임대주택의 비율이 주거권 현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그동안 주장해왔던 것들을 감안할 때 진보신당이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권을 정치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는 중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정책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택 대출을 통해 자가 소유를 획득하고, 적어도 어느 정도의 주거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월세 주거비 부담으로 반지하나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보다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고 볼 수 없다. 사회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 무궁무진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정책을 더 우선순위에 놓는지도 인권의 관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전월세 안정화를 전년 대비 인상률 제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득변동률을 기준으로 상한 기준을 마련해 이루겠다고 하지만, 정작 인상률과 무관하게 주거비 부담을 이미 심각하게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집값과 임대료에서 충분히 거품이 빠지고 인상률이 제한되더라도 주거비 부담은 개별 가구의 소득과 연동되는 문제이므로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은 남는 문제다. 물론 이것은 고용과 노동, 기초생활보장 등 다양한 방식으로도 접근해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하루아침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주택이 사회적 공공재의 성격을 더욱 많이 지니도록 하는 것은 주거권의 실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주택이 이미 시장재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서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더욱 다양한 상상력과 정책 조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주거의 공공성을 높여야 할 이유로서의 주거권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청년의 주거권?
어느 정당이나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정책도 있다. 바로 청년 1인가구를 위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이다. 아직 주거정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하지 못한 녹색당조차 청년과 비혼여성을 위한 전용공동임대주택을 주요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학생들의 주거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급격히 부상했고 이와 유사하게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의 주거 문제도 ‘고시원’이라는 열쇠말을 매개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는 인구 변화가 주거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1인 가구 안에도 다양한 집단이 있으며 그/녀들이 주거 문제를 겪게 되는 맥락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각 정당은 정책을 제시하는 만큼 정책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듯하다.
기존의 주거정책들 중에도 특정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들이 있었다. 주거권을 논의할 때에도 비차별의 원칙은 취약계층에 대한 우선적 주택 공급을 포함한다. 주거권의 실현을 위한 보편적 접근은 대상별 접근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가 어떤 집단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고려하는지는 중요하다.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주택 공급은 주거정책보다는 사회보장정책의 일환으로 잔여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보다 있는 만큼에서 나눠주는 시혜였다. 그 외 노인, 장애인, 비/미혼모, 탈성매매여성 등에 대한 제한적 주택공급 역시 해당 집단에 대한 복지 제공의 차원으로 조금씩 생겨났다. 쪽방이나 비닐하우스 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임대주택 공급이 오히려 최근에서야 마련되었다는 점은 주거에 대한 필요보다 다른 논리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위 집단들은 고유한 주거권의 문제를 겪고 있다. 또한 점차 다양한 인구집단이 겪는 주거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차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주거권의 실현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새롭게 부각되는 인구집단의 주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모두 공공임대주택을 할당하라는 요구로 성급히 수렴되어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공공임대주택을 얼마나 확보하든 한정된 물량을 놓고 할당량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은 보편적인 주거권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지금 대학생, 청년, 비혼여성들이 겪는 주거권 문제의 원인은 공공임대주택의 부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경험해 온 주거정책 중 주거권의 맥락에서 접근할 만한 것이 공공임대주택밖에 없었다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놓여 있는 민간임대주택 시장의 문제를 우회할 수가 없다. 운이 좋아 공공임대주택 입주권을 얻지 못하는, 더욱 많은 소수자들이 주거정책에 이름표를 얻었다는 상징만 공유한 채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집단별로 주택이 필요하다고 할 때 우선순위의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이주노동자, 이주민보다 성소수자에게 우선적으로, 또는 더욱 많은 주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마다 주거에 대한 접근성을 저해하고 차별을 낳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살피되, 해당 집단의 주거권 현실이 동일하지만은 않은 지점도 살펴야 보편적인 주거권의 실현을 향해 갈 수 있다. 서로 다른 건강 문제를 가진 집단에 병원 무료 이용권만 나눠주는 것으로 건강권을 실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공임대주택 공급도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소수자 주거권의 요구는 현실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인구집단별로 접근하는 것은 해당 집단이 겪는 문제를 더욱 구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살피며 종합적인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보편적 주거권이 자칫 동일한 대우로 오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차별의 시선을 벼리게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어떤 맥락에서 의미화 되면서 중요성이 부각되는지에 주의해야 한다. 청년을 위한 주택 공급을 똑같이 말하지만, 민주통합당은 군인들의 주거 문제도 공약으로 내걸고 있으며, 이명박 정권은 신혼부부에게 보금자리주택을 특별공급한 바 있다. 주거의 문제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다른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모든 정당이 청년의 주거 문제를 주요 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어도 주거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예비노동력이자 사회적 분노가 응축되고 있는 대표 집단이 청년이라는 점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분명하다. 어느 정당도 홈리스(거리노숙인만 상상하는 것을 뛰어넘길, 제발)를 체계적으로 정의하고 대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우려할 만한 지점이다. 제도와 틀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획되지 않은 채 동일하게 반복되는 이 정책들은 위험할 수 있다.
주거권의 정치가 시작되어야
주거권이 보이지 않는 주거공약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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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은 주거권을 언급하며 선언적인 수준에서라도 주거기본법이나 주거복지법의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누리당과 진보신당은 주거권을 언급하지 않는다. 여전히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 수준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며, ‘주거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여부로는 정책공약을 충분히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회권, 그 중에서도 주거권
주거권은 흔히 사회권의 한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인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회권을 부정하거나 홀대하는 현실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권운동은 끊임없이 사회권을 특히 더 강조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 보니 ‘사회권도 인권’이라는 추상적 담론을 사회화시키는 데에 힘을 써야 했고, 인권의 실현을 위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충분히 제안하지 못했다. 물론 취약한 사회권 보장의 현실 때문에 비인간적인 조건을 강요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싸우며 사회권의 의미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을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의제화 하려는 노력도 진행됐다. 하지만 사회권의 실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책들은 층위나 분야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꽤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어떤 수준에서 인권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지 명쾌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라는 인권의 근원적인 요청은 여러 정책을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달성되기 어렵다. 뒤집어 말하면 개별적인 정책에 대한 접근으로는 사회권 보장을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사회권으로 분류되는 영역의 권리들이 유사하게 부딪치는 쟁점들 외에 각각의 영역별로 가지게 되는 고유한 어려움이 있다. 거기에는 해당 권리가 주요하게 다루는 내용의 성격에 따른 것도 있고 한 사회가 놓인 역사적, 구조적 맥락에 따른 것도 있다. 사회보장(대체로 소득보장), 의료, 교육, 주거는 복지국가의 네 기둥이라고 일컬어진다. 물론 한 국가 안에서도 각 영역별 정책 기조는 예상과 달리 일관되지 않으며 특정 분야의 정책이 하나의 권리에 대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회권의 실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들임은 분명하며 이 영역들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정책 영역으로 보면, 주거권 실현을 위해 불가피하게 주택이라는 재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주택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보다 매우 비싸다. 생산하는 데에 거대한 비용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점은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여러모로 제약 요건이 되었고, 그만큼 주택은 전 세계적으로 시장의존도가 높다. 다른 재화나 서비스에 비해 상품성 또는 재산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강하다. 한국에서도 주거와 관련된 정책들은 건설경기 부양이나 부동산 시장 관리와 같이 경제정책으로 다루어졌다. 사회적으로 쟁점이 될 때에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에는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개발 문제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며 정치적 쟁점이 되었지만 이 문제 역시 주거권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전세계적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인해 개발이익이 충분히 발생하기 어려운 조건이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용산참사는 국가폭력의 잔인함과 동시에 주거권을 환기시켰으나 주거권 패러다임의 부재는 여전히 한국사회에 남은 과제다.
땅 위를 맴도는 주거권의 역사
인권은 이론적 근거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이기 보다 인간다운 삶을 향해 저항해온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건강, 교육, 소득보장에 대한 권리들과 비교하면 주거권에 대한 인식이 가장 미약하다. 외환위기로 급속히 증가한 실업 문제를 배경으로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된 것은 시혜에서 권리로의 전환을 대표하는 것으로 대개가 인정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시작된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은 권리에 대한 학습효과를 낳았고 의료와 관련된 정책들은 사회적으로 주요 쟁점이 되어 왔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무상의무교육이라는 분명한 정책과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지위 등은 교육 문제를 권리화하는 담론의 배경이 되었다. 물론 여러 맥락에서 여러 내용으로 등장하는 ‘권리’ 주장이 늘 사회권으로 이해될 수는 없으며 ‘권리’ 담론이 권리의식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주거권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주거권은 여전히 설득력이나 호소력이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나 정책 목표로 잘 등장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한국사회에 주거권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20년대 초에는 복지국가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회주택조합 또는 협회와 유사한 주택구제회, 주택조합 등이 결성되었다. 조선인 자본가 계층이 주도했고 주거문제를 처음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외국의 경험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일제는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주거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공공주택에 해당하는 부영주택을 건설했으나 주택 건설을 위해 원래 살던 도시빈민들을 강제퇴거시키는 등 한국의 개발독재정권과 다르지 않은 대응을 보였다. 1930년대 들어서는 자본가 계층이 운동에서 멀어지면서 차가인, 즉 세입자들이 주거권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차가인동맹을 조직하거나 철거반대투쟁을 하면서 임대료(집세) 인하, 차가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안정적인 점유기간이 전혀 보장되지 않아, 1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 반공독재정권이 수립되어 유지되는 동안 거의 잊혀졌다.
독재정권이 막바지를 힘겹게 달리던 1989년에는 전세값이 역대 최고(현재까지도)로 폭등하면서 잇단 자살이 주거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을 추도하는 합동추도식도 열렸고, ‘철마다 쫓겨나는 세입자 신세’, ‘엄마, 또 이사 가?’, ‘폭등! 전세값 더 이상은 갈 데 없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소형 임대주택 공급 등을 요구하는 집회도 당시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주택임대차보호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이 시기 이후 20년 동안 세입자의 주거권 주장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주거와 관련된 진보 개혁 성향의 요구는 분양가상한제와 공공임대주택 확대로 수렴되었다. 노태우 정권이 자가 소유 촉진 기조를 지키면서 시혜적 차원에서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약속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접근이었다. 영구임대주택이 주거권 혹은 주거복지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첫 정책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나, 시간이 흐르며 사회적 분리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시민사회가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데에도 책임이 있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주거권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철거민 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철거민 투쟁은 민중운동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줄기를 이어왔다. 철거민들이 처한 현실은, 소유권 없이는 점유권을 주장할 길이 전혀 없는 세입자의 보편적 현실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강제퇴거는 중대한 인권침해로서, 강제퇴거로부터의 보호는 국제인권규범에서 국가의 최소핵심의무로 명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책 없는 강제철거 반대한다’라는 철거민들의 절절한 호소는 보편적인 주거권을 확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개발독재정권의 폭압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재개발의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철거민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해결에 이르지 못하는 임시 대책들로 포획되어 버리고 인권을 외치는 그/녀들의 열망은 인권의 언어를 얻지 못한 채 흩어져갔다. 철거민 투쟁에서 인권이라는 말은 용역깡패나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비자발적으로 쫓겨나는 것 자체가 인권의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최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개발 사업에서 대표적인 세입자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임대주택 입주권은 개발이익의 일부를 사회화하는 차원에서 임대주택 건립을 의무화하는 것일 뿐, 누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지는 책임지지 않는 정책이었다. 재정착은 거주민의 권리로 확립되지 못했고, 그에 앞서 누구도 비자발적인 퇴거를 강요당해서는 안 되며 국가는 모든 사람을 강제퇴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주거권의 정치가 필요하다
위와 같이 주거권이 권리로 인식되기 어려운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주거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하던 당시에도 권리라는 점 자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던 것을 여기에서 다시 힘주어 강조하지 않겠다. 문제는 종잇장 위에 잠들어 있는 주거권을 어떻게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불러낼 것이냐다. 이를 위해서는 주거권의 내용을 명확히 밝히고 주거권의 관점에서 주거 관련 정책들을 꿰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리는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권리를 향한 힘을 모아내고 터뜨릴 수 있다. 그것이 주거권의 정치일 것이다. 주거권은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 설명되는데 주거정책에서 특히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주거의 수준, 점유의 안정성, 주거비 부담, 그리고 비차별의 원칙이다.
주거권은 주택에 대한 권리로 환원될 수 없지만 적절한 주거 환경의 확보는 주거권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다. 한국의 최저주거기준은 면적과 방실의 개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으로 주택을 지목했듯 여러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채광이나 통풍, 환기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공급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택에서 살아가게 된다. 고시원이나 쪽방은 평당 임대료가 타워팰리스보다 높은 수준이지만 보증금이 없다는 조건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 중 자가 거주 가구가 적지 않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의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질의 주택이라는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또한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를 국가가 책임질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다. 주택보급률이 일정한 수준을 넘었고, 과거와 같이 대규모 정비사업을 통해 주거환경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어려운 현실(과거의 재개발 사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에서 기존 주택들의 주거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이며, 주거환경의 개선 효과가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도록 할 것인지 드러내야 한다. 19대 총선 공약에서 대부분의 정당들은 뉴타운 재개발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지만 저소득층 거주민들을 중심에 놓고 주거재생을 꾀하는 접근은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정도에서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당도 인간다운 삶을 뒷받침할 수 있는 주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며 그 수준에 미달하는 주택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거권의 관점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점유의 안정성은 집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한 사람들, 즉 민간임대시장에서 주택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물론 소득분위별로 편차가 있다. 한국은 임대차보호가 취약하기 때문에 집주인이 임대료를 올리라고 할 때,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난할수록 이사도 더 많이 다녀야 하는 것이다. 주거권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녀가 어떤 집에 살고 있든 삶을 충분히 펼쳐놓을 수 있는,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간이 보장되어야 함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몇 년을 보장할 것이냐 어떤 방식으로 보장할 것이냐의 제도적 접근 이전에 이 점이 확인되어야 한다. 누구나 살고 싶은 만큼 한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국가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호해야 한다. 특히 한국적 임대차제도인 전세제도의 광범위함 때문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를 중심으로 임대차관계에 접근하고 있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재산보다 주거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번 총선공약에서 제시된 민간임대주택의 등록제와 임대차계약 갱신우선권 역시 이런 방향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자리매김 될 때에만 주거권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등 강제퇴거로부터의 보호도 중요한데, 이것은 주거비 부담 문제로도 이어진다. 주거비를 부담할 형편이 안 돼 비자발적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임대료를 보조하든, 임대료 인상을 규제하든, 경매를 제한하든 거주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는 분명하다.
주거비 부담은 모든 정당이, 또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소리 높여 말하는 주제다. 그러나 주거비 부담은 소득과 비교해 주거비가 얼마나 지출되는지의 문제로, 다른 부문의 정책 역할이 크다. 또한 이미 부풀대로 부푼 부동산시장에서 가격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한편 주거비 부담은, 임대료의 문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자금대출의 이자 또는 상환금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지불되는 비용의 성격이나 그것의 최종 소유자는 달라진다. 그래서 임대료에 대한 규제(공정임대료 산정, 전월세 상한제 등), 임대료 보조제도뿐만 아니라 주택금융제도 개선 등 다양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전세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월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시장의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누구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위협하는 정도로 주거비 부담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출발점이자 최종 목표로 놓는 것이다. 소득이 없거나 적어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서,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주거환경을 강요당하거나, 그 곳에서조차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돈을 셈하고 또 셈하며 발품을 팔 때마다 절망을 확인해야 하는 현실을,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제로, 인간을 모욕하는 사회의 문제로 바꾸어내는 것이 바로 주거권의 정치인 것이다.
이 모든 요소와 각각의 정책들은 언제나 비차별의 시선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독거노인, 장애인, 비/미혼모, 이주민 등의 집단이 겪게 되는 임대거부 등의 직접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과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양한 집단이 집단의 특성에 따라 처하게 되는 주거문제들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장애인이 거주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갖춘 주택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나, 주택뿐만 아니라 주거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 그에 맞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편, 접근성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없애는 것 외에 주거취약계층에게 주택이나 급여 등 자원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때 ‘홈리스’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홈리스는 누구에게도 기꺼운 호칭이 아닐 것이나 적절한 주거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정의되어야 하고 각각의 경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거리노숙뿐만 아니라 쪽방, 고시원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거주하는 상태, 친척이든 친구든 남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는 불안정한 상태, 주거비 부담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생활을 위협하는 상태 등이 그것이다. 많은 수의 청년들과 탈가정 청소년들 역시 이 범주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주거권의 정치를 위한 질문을 길어 올려야
주거권은 특정한 정책이나 제도 자체를 지시할 수 없다. 주거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특정한 문제를 하나의 정책 효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사회마다 그 사회가 자리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정책이 주거권 실현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정책이나 제도가 주거권 실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제시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지표의 설정을 통해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각각의 정책이나 제도들은 물리적, 경제적 접근성이나 비차별 원칙 등을 통해 세부적으로 점검되어야 하며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당연히 시장에 대한 개입은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실현가능성이라는 의문부호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국가가 없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 또한 단번에 실현될 수 없다거나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권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사람이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그 사람이 인간다움을 누리고 만들어가는 역량을 구성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디에선가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나 집에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 계획할 수 있는 인생, 얻을 수 있는 자원,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이 달라진다는 점을 안다. 또한 집이 모욕감과 서러움, 비참함, 절망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주거권이다.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모습에서 개발의 문제점만을 읽어서는 안 되며, 고시원에서 살기를 감행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고시원의 열악한 환경과 청년실업의 문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분양가상한제는 건설자본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를 막는 의미도 있었지만 분양을 꿈꾸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비가시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우스푸어들이 이자나 상환금의 형태로 사실상 월세를 내면서도 굳이 집을 사는 것을 선택해야 했던 상황을 근본적으로 봐야 한다. 주거권의 관점에서 누구를 어떤 맥락에서 주목할 것인지, 무엇을 문제 삼을 것인지 밝혀야 한다.
주거권이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재산권’이라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주거권의 정치를 위해서는 재산권을 우회할 수 없다. 사실 재산권은 인권과 뿌리가 같다. 그러나, 그래서 재산권은 모든 인권이 그러하듯이 오직 다른 인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한국사회가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주택이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모두 인권으로 옹호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각자가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주택을 어느 정도까지 재산으로 보호할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 소유를 제한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을 거주용으로 임대해서 소득을 얻는 집주인들이,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난감한 현실은 끝내야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불문하고 돈이 있는 만큼 차지하는 것을 승인하는 탐욕의 동맹도 끊어야 한다.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근간에 놓인 생산체계에서도 시선을 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 소유의 욕망을 도덕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그 안에 숨은 주거권에 대한 열망까지 함께 폐기처분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가난할수록 내 집 마련의 꿈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 꿈들은 벗어나기보다는 조금씩 손보면서 살 수 있는 수준의 집에서, 다른 꿈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주거비 부담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살고 싶은 꿈인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껏 이런 집을 소유권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각인시켜왔다. 주거권은 이 꿈을 다른 방식으로 담아야 한다.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이 의미 있는 정책들을 제안했지만 개별 정책에 붙들려 주거권의 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쉽다 녹색당은 아예 주거정책이라 할 만한 것을 내지 못했다. 주거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땅이라는 모든 생명의 터전을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점유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녹색당만이 제안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다려진다. 이런 아쉬움들은 사회권 현실이기도 하다. 한편에서는 권리임을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냥 추상적인 가치로 승인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주거권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은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주거정책만 보고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주거정책을 보면 정당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정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주거 문제와 관련해 발언해 온 모든 운동 진영에 고스란히 되돌려야 할 평가다. 또한 정치가 정당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운동들이 주거권에 주목하는 것을 늦춰서는 안 될 이유다. 인권은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틈새에서 체제의 틀을 바꾸고 힘을 새롭게 배치할 질문들을 던지는 것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집에 살고 싶은 만큼 살면 안 돼? 왜 집주인이 내라는 대로 임대료를 내야 해? 나는 그만큼 낼 수 없는데? 돈이 없다고 우울한 반지하방에서 살아야 해? 부모가 집이 없으면 나도 집이 없는 채로 살아가야 해? …… 연말에 있을 대선에서는 질문이 던져지기를, 주거권의 정치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